상편(上篇)
이름문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은 한 개인을 대표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데에 쓰이는 명사이고, 또한 사회적으로는 개인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법률적 보호를 받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름이란 하나의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이름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좀 더 깊이 생각을 해 본다면 간단하게 여겨지는 이름 속에는 아주 풍부한 정보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일생과 동반을 하면서 생생한 그 사람만의 독특한 인생사가 뒷받침이 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할 때에 떠오르는 것이라면 그 이름 자체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생긴 모습, 성격, 나와의 관계, 살고 있는 집의 모양, 전화번호, 결혼상황, 부모, 자식, 사업, 건강 등의 온갖 형상들이 연상되게 되고, 또한 이름은 그 사람의 실제의 풍격, 명예, 명성 등의 실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그저 간단한 부호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겠다.
속담에 이르기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고 하는 말은 그만큼 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이름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평생 삶의 결과가 훌륭한 사람의 인생은 후세에 대대로 전해지면서 세상 사람들의 공경을 받고 있는가 하면 살아 있을 때 지탄을 받은 나쁜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악명으로 남아 대중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의 이름은 한 시대의 역사적 상징이 되어 그 시대의 무형의 정신적 힘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의 이름은 성어나 속어 등의 형식으로 사회에 널리 통용되어 문화생활을 다채롭게 하기도 한다.
이름이란 것에 대하여 지나온 수 천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름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한 가문이 형성되고 발전하여 온 과정, 그리고 역사시대의 민족문화, 정치, 경제, 풍속, 예의 등 시대의 특징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그 외에도 인생에 대한 희망, 축복, 도덕, 이상, 신앙, 욕망 등 정신세계가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단 몇 글자로 되어 있는 이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이름 몇 글자의 본래의 뜻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 외에도 이름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거기에는 주어-술어, 형용사-명사, 동사-명사 등 다종다양한 언어로 되어 있으며 그 글자들 사이에는 유기적으로 조합이 되어 있다. 이름을 발음상으로 살펴보면 부르기가 쉽고 듣기 좋은 음률로 구성되어 있어 어떤 이름은 부르면 우렁차고 강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또한 어떤 이름은 그와 반대로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을 주고 있어 다채로운 음률의 세계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름의 글자에 담겨있는 뜻을 보면 거기에는 축복, 신앙, 애착, 희망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평생 동안 인생의 좌우명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이름은 단지 간단한 부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형식의 문학작품이라고 하겠다.
이 세상에는 분야가 다른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작품의 구조가 아주 간단하면서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가 이름처럼 풍부하고, 사용하는 시간이 이름처럼 길며, 사용하는 횟수가 이름처럼 많고, 사용하는 사람이 이름처럼 많으며, 그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이 이름처럼 많은 작품이란 이름을 제외하고는 달리 찾을 수가 없다고 본다. 하나의 우수한 작품인 이름은 사람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좋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고, 하나의 저속한 작품은 사람의 인생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은 물론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름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름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의 특수한 문화형식인 ‘이름문화’로 형성이 되었고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조성되었으며 이름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민속학, 고고학, 언어학, 문자학, 미학 등 각종 학문 분야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름이라는 것이 비록 간단한 몇 개의 글자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는 실로 깊은 학문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1 장 이름의 유래
한국어에 “이름”이라고 하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옛 말의 “일훔”이 변한 것인데 ‘일훔’은 ‘이르다’의 옛 말 ‘일흐(다)’에 ‘ㅁ’이 붙은 것으로 ‘말 하는 것’, ‘부르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다가 “일훔”에서 ‘ㅎ’이 빠지고 모음 ‘ㅜ’가 ‘ㅡ’로 바뀌어 “이름”이 된 것으로 “이름”은 사람에게 지어서 각각의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름을 살펴보면 보통 한 가문을 대표하는 성(姓)에 개인을 표시하는 이름(名), 이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성명(姓名)이라고 하고 있다. 이름(名)은 보통 두 글자로 구성되어 그중의 한 글자는 돌림자로서 변하지 않는 세대(항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면 도대체 ‘성명이란 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제 1 절 성씨(姓氏)의 유래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에 보통 상대방을 보고 “성씨가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 예사이다. 여기에서 ‘성씨’라고 하는 것은 성(姓)을 일러 하는 말인데 원래 옛날에는 ‘성’과 ‘씨’는 별도의 함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고 하는데 한 글자로는 ‘성’이라고도 한다.
1. 성(姓)의 기원
성의 기원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것이 모계사회시대에 산생이 되었다고 논하고 있는데, 성(姓)이란 글자를 보게 되면 “여(女)”자와 “생(生)”자 두 글자로 구성이 되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성(姓)에 관하여 “성(姓)이란 사람이 ‘출생하다’라는 뜻이다. 옛날 성인은 어머니가 하늘에 감응하여 자식을 잉태 한 것이니 천자라고 하였다. 출생하면 성(姓)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여(女)자와 생(生)자 이 두 자를 합하여 쓴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성(姓)’이라고 하는 것은 최초에는 여성이 자식을 낳는 것과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발전을 역사적 시각으로 볼 때, 고대 원시사회의 초기의 인류는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혈통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자연히 원시적인 무리를 형성하며 살아 왔었다. 그 때 당시에는 생산능력이 아주 낮아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혹은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으며 또한 고정된 거주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 점차 씨족사회로 발전을 하였는데 최초에는 여성이 권력을 잡고 있었던 모계사회였다. 그때에 태어난 자식들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알고 있었을 뿐 아버지는 몰랐던 것이다. 또 당시에 있었던 혼인제도는 한 씨족내부끼리는 혼인이 금지되어 있었고, 단지 씨족끼리 무리를 지어 혼인을 하는 제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씨족들 사이에 왕래가 빈번하고 혈연관계를 구별하자니 일정한 칭호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씨족내부에서의 최고 권력자가 여성이다 보니 자연히 여성계열을 따르게 되었던 것으로 여생(女生)이 대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성(姓)은 한 씨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지방의 특징을 따르게 되었는데 많은 성은 계집녀(女)변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설문해자에 “강(姜)씨 성은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여 그것을 성으로 한 것이고, 희(姬)씨 성은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여 그것을 성으로 한 것이며, 요(姚)씨 성은 순(舜)의 어머니가 요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하여 그것을 성으로 한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姓)이 모계사회 때 산생되어 발전해 왔다고 하는 것에는 충분한 논리가 있다고 보겠다.
2. 성(姓)의 변화
세월이 변화하면서 사회가 점점 발전하게 되자 남성의 역할이 많아짐에 따라 사회적 권위도 상승하게 되었고, 혈연관계도 어머니 위주로 진행되던 것에서 점차 아버지계열로 힘이 전환되게 되었는데 그에 따라 성(姓)의 본래의 의미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아래에 예를 든 성에 대하여 그 형성과정을 설명하기로 한다.
● 조씨(趙氏)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익(伯益)의 후손인 조부(造父)는 주목왕(周穆王)의 수레를 모는 대부(大夫)란 벼슬에 있었는데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압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그에게 조성(趙城;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의 북쪽지방)을 봉하여 주었는데 후에 그의 자손들은 그에 따라 성(姓)을 조(趙)씨라고 하였다 한다.
● 손씨(孫氏)
손씨의 한 줄기는 희(姬)씨로 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주나라 위무공(衛武公)에게는 이름이 혜손(惠孫)이라고 부르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혜손의 자손들이 혜손의 손(孫)자를 성(姓)으로 하여 손씨라고 하였다. 다른 한 줄기는 전(田)씨로 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제(齊)나라에 이름이 전서(田書)라고 부르는 대부(大夫)가 있었는데 나라를 위하여 많은 공훈을 세웠다고 하여 제경공(齊景公)이 그를 낙안(樂安; 지금의 산동성 광요현이라는 곳)이라는 곳을 봉하여 주고는 그에게 손(孫)이라는 성(姓)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이씨(李氏)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도(皐陶)는 소호(少皡)의 후손인데 고도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은 세세대대로 대리(大理)란 직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대리라고 하는 직책은 사법(司法)의 관직이었기에 그들은 관직의 부름에 따라 성(姓)을 이(理)씨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이정(理利貞)의 아버지인 이정(理征)이 법을 너무 잘 지켜 그만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그의 노여움으로 사형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정은 어머니를 모시고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그 도망가는 길에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자두나무의 잎을 따 먹어 가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나중에 그 자두나무의 은혜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그 후 이(理)씨를 그와 발음이 같은 이(李)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 장씨(張氏)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황제(黃帝)의 손자 휘(揮)가 남달리 아주 총명하여 활을 발명하였었는데 황제가 그에게 활과 활촉을 만드는 것을 관할하는 관직인 궁정(弓正)이란 벼슬을 내리고 또한 장(張)씨란 성(姓)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장씨의 다른 줄기는 진(秦)시대의 한(韓)나라의 귀족이었던 희량(姬良)으로 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희량이가 진시황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희씨성을 장씨로 고쳤다고 한다.
● 유씨(劉氏)
유씨의 한 줄기는 기(祁)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요(堯)임금의 성(姓)이 원래는 윤기(尹祁)였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 중 한 갈래가 기(祁)를 성씨로 하여 유국(劉國; 지금의 하북성 당현이라는 곳)에 임명이 된 후에 그 나라의 이름을 따서 성을 유(劉)씨라고 하였다. 그리고 춘추(春秋)시대에 왕계(王季)라는 사람이 유읍(劉邑; 지금의 하남성 언사라는 곳)에 임명이 되었는데 그의 호가 유강공(劉康公)이어서 그의 후손들은 성을 유씨라고 하였고, 유씨는 그 외에도 한(漢)나라 때 황제가 항(項)씨와 루(婁)씨에게 하사한 유씨가 있는가 하면 흉노족 중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유씨라고 한 것도 있다.
● 주씨(周氏)
주씨의 한 갈래는 희(姬)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주씨의 선조 후직(后稷)이 원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무공현 일대에서 거주를 하였었는데 후에 고공단부(古公亶父)때에 가족을 거느리고 주원(周原; 지금의 섬서성 위하평원일대)이란 곳에 이주를 하였다. 그 후부터 주씨 가문으로 되어 고공단부의 증손자인 주무왕이 주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 외에도 주씨는 북위(北魏)나라의 보내(普乃)씨로 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 있고 또 주평왕(周平王)의 아들이 여남(汝南)에 봉을 받은 후 주씨라고 한 것도 있다.
● 오씨(吳氏)
오씨는 여러 갈래의 기원이 있다. 황제(黃帝)의 후손인 희성(姬姓)오씨가 있는가 하면 순(舜)의 후손인 요성(堯姓)오씨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염제(炎帝)의 신하였던 오권(吳權)의 후손들이 오씨가 되어 오씨의 한 갈래로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하(夏)나라의 국왕 소강(少康) 때에 오하(吳賀)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오씨가 되었다고 하는 말도 있다. 또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주태왕인 고공단부의 맏아들 태백(太伯)이 오씨의 시조이고 둘째 아들인 중옹(仲雍)이 대를 이은 시조라고 하기도 한다.
● 희씨(姬氏)
황제(黃帝)가 희수일대에서 살았다고 하여 그 강의 이름을 따서 희씨라고 하였다 한다.
위에 예를 든 성씨의 형성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성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 있고, 어떤 성은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 따라 지은 것이 있으며, 어떤 성은 봉사하고 있는 관직에 따라 지은 것이 있고, 어떤 성은 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있고, 또 어떤 성은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성으로 바꾼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게 된 것이다.
성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화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시대의 변천에 의하여 부단히 변화하는 측면도 있다. 어떤 성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는가 하면 또 어떤 성은 새로 생성된 것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서 성이 같다 하더라도 원래의 같은 줄기에서 뻗어 내려 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가 하면, 또 서로 다른 성이라고 해도 원래의 같은 성에서 변화하여 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과 경제가 매우 발달해진 지금, 세상에는 지구가 하나의 마을로 되어 가면서 사람들의 종족개념도 점차로 과거와 달리 상당히 변화가 많아 어떤 가문에서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姓)이라고 하는 것은 기나 긴 역사 발전의 산물로서 하나의 혈연과 가문을 대표하는 기호인데,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한 가문이 몇 천 년을 거치면서 변화하여 내려 온 희로애락과 고통의 역사가 깃들어 있으며, 또한 거기에는 과거 역사의 특징 그리고 한 가문의 문화, 풍속, 예의, 신앙, 정절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姓)이 비록 한 글자 혹은 두 글자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는 그 글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뜻을 훨씬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3. 씨(氏)의 기원
송나라 때 정초(鄭樵)가 쓴 통지서(通志序)란 책에는 “씨라고 하는 것은 귀천(貴賤)을 구별할 때 쓰는 것이다. 귀한 사람에게는 씨가 있지만 천한 사람에게는 이름만 있을 뿐 씨가 없는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좌전·은공팔년(左傳·隱公八年)》에는 “천자가 덕을 쌓은 사람을 제후로 삼고 그의 태어남에 따라 성을 하사하고 땅을 봉하여 주고는 씨라고 불렀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사기·오제본기 (史記·五帝本紀)》에는 “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혈통계열로 백세를 가면서 달라지지 않는 것이고, 씨라고 하는 것은 자손들의 출신을 분별하는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당시에 있어서 ‘씨’라고 하는 것은 같은 씨족안의 사람이 모두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씨족 중에서 귀족의 표시 칭호로 사용이 되었던 것으로 성의 한 갈래였었다. 그리고 ‘씨’는 모계씨족사회가 부권씨족사회로 전환된 후의 산물인 것이니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씨’는 부권씨족사회에서 기원이 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씨’를 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떤 ‘씨’는 천자가 하사하여 준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씨’는 왕이 봉해준 도시의 이름을 ‘씨’로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씨’는 종사하고 있는 관직의 명칭을 ‘씨’로 한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에 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성’과 ‘씨’의 산생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가족의 형성은 부족(部族)에서 아주 오랜 후의 일로서 ‘성’의 탄생은 ‘씨’가 있은 후의 일이라고 하는 한 가지 설이 있는데, 이는 시대가 변천해 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계급관계도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성’과 ‘씨’가 갖고 있던 원래의 함의에도 큰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부터는 ‘성’과 ‘씨’를 더 이상 구별을 하지 않게 되었고, 단지 ‘성’이라고 하든가 혹은 ‘씨’라고 하든가 아니면 더 나아가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고 하게 되었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저 간단하게 ‘성’이라고 하고 있다.
‘성’과 ‘씨’는 그 형성된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생명력과 변화도 같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씨라고 하는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변화 할 수 있으나 성이라고 하는 것은 천만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 사용하고 있는 ‘씨’라고 하는 것에는 ‘성’과 같은 함의를 갖고 있는 외에 또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박00씨”, “찰스다윈씨” 등의 형식으로 유명한 사람의 이름 뒤에 사용을 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이미 결혼한 여성의 ‘성’의 뒤에 붙여서 그의 칭호로 사용이 되기도 한다. 이때에는 보통 아버지의 ‘성’ 앞에 남편의 ‘성’을 붙여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조왕씨(趙王氏)”라고 한다면 그 뜻인 즉 남편의 ‘성’이 조씨이고 아버지의 ‘성’이 왕씨라는 것이다.
4. 중국 사람의 성씨
중국 사람들은 보통 ‘성’에 대한 말을 하게 되면 바로 “백가성(百家姓)”이란 말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송나라 때의 ‘백가성’이란 책이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비록 백가성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 백가성이란 책 안에 수록되어 있는 ‘성’의 가지 수가 단지 백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글자로 된 단자 성이 408개이고 두 글자로 된 복성이 30개로서 모두 합하면 438개의 ‘성’이 있다. 그런데 이 438개의 ‘성’도 그 때 당시에는 비교적 널리 사용이 되고 있었던 성씨 중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서 실제로는 더욱 많은 숫자가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백가성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성씨가 있다.
● 단성(單姓); 408 개
趙錢孫李周吳鄭王馮陳褚衛蔣沈韓楊朱秦尤許何呂施張孔曹嚴華金魏
조전손리주오정왕풍진저위장심한양주진우허하려시장공조엄화김위
陶姜戚謝鄒喩柏水竇章云蘇潘葛奚范彭郞魯韋昌馬苗風花方兪任袁柳
도강척사추유백수두장운소반갈해범팽랑로위창마묘풍화방유임원류
鄷鮑史唐費廉岑薛雷賀倪湯滕殷羅畢郝鄔安常樂于時傅皮卞齊康伍余
鄷포사당비염잠설뢰하예탕등은라필학오안상락우시부피변제강오여
元卜顧孟平黃和穆蕭尹姚邵湛汪祁毛禹狄米貝明臧計伏成戴談宋茅龐
원복고맹평황화목소윤요소담왕기모우적미패명장계복성대담송모방
熊紀舒屈項祝董梁杜阮藍閔席季麻强賈路婁危江童顔郭梅盛林刁鍾徐
웅기서굴항축동량두원남민석계마강가로루위강동안곽매성림조종서
邱駱高夏蔡田樊胡凌霍虞方支柯昝管盧莫經房裘繆干解應宗丁宣賁鄧
구락고하채전번호릉곽우방지가잠관로막경방구무간해응종정선분등
郁單杭洪包諸左石崔吉鈕龔程嵇邢滑裴陸榮翁荀羊於惠甄麴家封芮羿
욱단항홍포제좌석최길뉴공정혜형활배륙영옹순양어혜견국가봉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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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豊巢關蒯相査后荆紅游竺權蓋益桓公淥
수풍소관괴상사후형홍유축권개익환공록
● 복성(復姓); 30 개
万俟(만사) 司馬(사마) 上官(상관) 毆陽(구양) 夏侯(하후) 諸葛(제갈)
聞人(문인) 東方(동방) 赫連(혁련) 皇甫(황보) 尉遲(위지) 公羊(공양)
潭台(담태) 公冶(공야) 宗政(종정) 濮陽(복양) 淳于(순우) 單于(단우)
太叔(태숙) 申屠(신도) 公孫(공손) 仲孫(중손) 軒轅(헌원) 令狐(령호)
鐘離(종리) 宇文(자문) 長孫(장손) 慕容(모용) 司徒(사도) 司空(사공)
이 백가성에서 성씨를 배열한 순서를 보면 제일 처음이 조씨이고 그 다음으로 두 번째에 있는 것이 전씨인데 이것은 각 성씨의 인구 숫자의 크기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그 때 당시 송나라의 임금이 조씨였고 이 책을 편찬한 사람의 성씨가 전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간행된 “성해(姓解)”란 책에 수록되어 있는 성씨의 숫자는 2568개나 되었다. 그 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떤 성은 사라져 버리고 또 어떤 성은 새로 생성되어 1987년에 출판된 “중국성씨대전(中國姓氏大全)”에 수록된 성씨의 숫자는 5600여개에 달하였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바에 의하면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씨가 약 8000개 이상 존재했었다고 한다. 성씨에 관한 통계와 정리 작업은 지금도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중인데 현재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성씨는 대략 500여개 정도로 추정이 되고 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서 사람의 숫자가 제일 많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이 세 개의 성씨인데 각기 한족의 총 인구수의 7%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족의 총 인구수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성씨에는 李王張劉陳楊趙黃周吳徐孫胡朱高林何郭馬(이왕장류진양조황주오서손호주고림하곽마)등의 19개가 있는데 그들의 총 인구수가 한족 총 인구수의 절반 이상인 약 55.6%를 차지한다고 한다.
제 2 절 이름의 유래
성(姓)이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 온 한 가문의 기호라고 한다면 명(名)이란 단 한 사람만을 대표하는 칭호이다. 사전을 보게 되면 이름이란 “사람의 성씨아래에 붙여 쓰는 개인의 칭호이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는데 때로는 성씨까지 포함하여 이름이라고도 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명(名; 이름)이란 자기가 아무개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데 입구(口)자와 저녁석(夕)자로 되어 있다. 저녁(夕)이 되면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 서로 알아 볼 수가 없는데 이때에 자기가 아무개라고 입(口)을 열어 부르는 것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명(名)이란 즉 하나의 특수한 소리로서 상대방에게 내가 누구라는 것을 전달하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한 종류의 부호인 것이다. 그 후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이름을 문자로 표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름이 契(계), 桀(걸), 啓(계), 鯀(곤),風后(풍후), 力牧(역목), 娥皇(아황), 嫘祖(누조), 附寶(부보) 등과 같이 한 자나 두 자로 되어 있어서 단독으로 사용을 하였지 성과 함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나라를 건립한 때부터 ‘씨’와 ‘이름’을 합하여 부르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과 ‘씨’가 합치게 된 후로는 ‘성’과 ‘이름’을 합하여 부르는 것이 사회적으로 습관화 되면서 姓名(성명)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온 것이다. 즉 孔丘(공구), 尹熹(윤희), 張儀(장의) 등이 ‘성’과 ‘이름’을 하나로 합하여 개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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