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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비법

[스크랩] 왕청임(王淸任)과 의림개착(醫林改錯)

한의학 입장에서 본 인체해부학은 일찍이 한나라 때 부터 연구하기 시작하여 기록에 남겨 놓았지만 아주 보잘 것 없었으며 부분적이거나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학술적인 연구가 미비한 채로 기록되어 있었다.

 

고대 경전(經典)인 내경(內經)과 난경(難經)과 갑을경(甲乙經)과 천금방(千金方) 등에 인체 해부학에 대한 부분적인 기록이 있다. 봉건적인 예법과 도덕관념의 영향을 받아 일반 백성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가훼상(不可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 라는 말을 굳게 믿고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신체는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다. 머리털 하나는 물론 살갗에 추호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야 말로 효도의 시작이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사람까지도 신체를 그대로 보존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종교적 도덕적 관념속에서 성장해 온 봉건 사회는 인체해부학의 발전에 크나큰 장애가 되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년간에 북경행의(行醫) 왕청임은 42 년 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인체 장부조직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해부학상 새로운 이론을 수집정리하여 의림개착이란 저서를 완성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후 서양 사람들은 이 책을 각각 자기 나라말로 번역하여 사용하게 됨으로써 왕청임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왕청임의 자(字)는 훈신(勛臣)이며 하북성 옥전현(玉田縣)에서 청나라 건륭 33 년(서기 1768 년)에 태어나 도광(道光) 11 년(서기 1831 년)에 향년 64 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왕청임은 어릴때 무술학교에서 무술을 연마하다가 후에 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열심히 의학연구에 정진하였다. 대량의 고전과 의학서적을 탐독하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 세 부터 행의를 시작하였다.

 

북경에서 행의할 때 그는 지일당(知一堂)이란 약포(藥鋪)를 개업하고 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북경일대에서 왕청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명망은 날로 날로 높아갔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모든일에 공명정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명백하였다. 그는 고대 음양오행 법칙을 이용하여 환자들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사들은 모름지기 인체의 해부구조와 생리작용을 이해함으로써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치료하여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점에 대하여 왕청임은 "저의학서적(著醫學書籍), 불명백장부생리(不明白臟腑生理), 여동치인설몽(如同癡人設夢), 위병인진단(爲病人診斷), 불명백장부생리조직(不明白臟腑生理組織), 여동맹인야행(如同盲人夜行)"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의학서적에 인체의 장부생리에 대하여 불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마치 정신병환자가 꿈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고 환자를 진단함에 있어서 장부생리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장님이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는 뜻이다.

 

그래서 왕청임은 인체 해부학과 생리구조를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청나라 중엽의 봉건적 수구(守舊)사회 속에서 일반 백성들은 왕청임의 행동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청임은 인체 해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협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상가(喪家)를 찾아 다니며 시체를 얻는 일은 범법행위였다. 상가에서는 온전한 시체를 하장(下葬)하는 관념이 머리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므로 시체에 칼을 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나라 가경 (嘉慶) 2 년(서기 1797 년) 왕청임이 30 세 되던 해에 10여 년간 인체해부에 대하여 번뇌하고 고심하던 왕청임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왕청임은 란주(滦州)의 도지진(稻地鎭)에서 행의하고 있을 때 였다. 이 지역에 소아온역(溫疫)이 창궐하여 매일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빈한한 집안 아이들의 시체는 대부분 의총(義塚) 매장을 주로 하였다. 의총매장이란?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다시말하면 흙을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흙을 시체위에 덮어 매장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들짐승들이 발로 흙을 쉽게 흩어버리고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물어 뜯어 밖으로 끄집어 내어 먹기 시작한다.

 

죽은 어린 아이들의 부모들은 일부러 들짐승들이 아이들의 시체를 뜯어 먹는 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풍속으로 들짐승들이 죽은 아이의 시체를 뜯어 먹으면 그 다음에 세상에 태어나오는 아기가 요사(夭死)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짐승들은 죽은 어린 아이들의 시체 중 맨 먼저 배를 찢고 나서 배창자를 제일 선호하기 때문에 먹다남은 뱃속의 창자가 어린 아이들의 뱃속에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어린이들의 시체가 공동묘지에 마구 널려 있었다. 그래서 들짐승들이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쉽게 뜯어 먹기 마련이었다. 들짐승들은 의총속에 들어 있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배가 부를때 까지 뜯어먹다가 남겨 놓았으며 뱃속에 들어 있던 창자들이 밖으로 나와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왕청임은 어린 아이들의 시체속에서 인체의 장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왕청임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막대기를 들고 공동묘지로 가서 시체를 뒤적거리며 관찰함으로써 인체해부구조를 더욱 자세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아이들의 시체는 거적대기로 둘둘 말아서 새끼줄로 동여매지 않은 채 공동묘지에 그냥 내버려 둠으로 들짐승들이 뜯어 먹기가 수월했다.

 

그는 10 일 동안에 이 삼십구(具)의 어린이 시체를 관찰하였다. 그 중 한 두개는 온전한 시체였다. 왕청임은 한 밤중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귀신도 모르게 온전한 시체를 해부하여 보았다. 왕청임은 입과 코를 수건으로 싸매고 고약한 송장 썩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체의 배를 갈라 자세히 5 장 6 부를 관찰하였다.

 

그리하여 고인들이 그려놓은 장폐화(臟肺畵) 속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발견하였다. 그는 인체구조에 대하여 확신이 생겼으며 더욱 깊이 연구하려는 결심도 생겼다. 왕청임은 흉복 사이에있는 횡격막(橫膈膜)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고서에 기재된 횡격막이 장부 사이에 있다고 한 것을 의심하였다.

 

어느 날 고씨(高氏)라는 의사가 왕청임을 만나러 왔다. 고의사는 자기를 소개한 후 "왕대부!  당신은 육조(六朝) 시대의 저서 남조사(南朝史)를 읽어 보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왕청임은 왜 이러한 질문을 자기에게 하는지 내막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왕청임은 "읽은것도 같고 읽지않은 것도 같은데 당신이 묻는 질문의 초첨은 무엇입니까?" 하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고의사는 "남조시대에 당사(唐賜)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사를 아십니까?" 하고 왕청임에게 물었다. 왕청임은 "으-음!  당신은 당사를 언급하는 것입니까?  나는 당사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당사는 일종의 괴병에 걸렸었지요. 자주 충(蟲)을 토해 냈는데 한 번 토할때마다 많은 충이나왔었지요. 죽기 전에는 20여 마리의 충을 토해냈습니다. 당사는 "내가 죽거든 나를 해부하여라. 그리고 나서 대부에게 연구하라고 나의 시체를 보여 주어라. 도대체 나의 병이 어떤 병인지? 그는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부인과 자식들 앞에서 유언을 했습니다." 고 고의사에게 대답하였다.

 

고의사는 왕청임의 말을 듣고 왕청임이 당사에 대하여 명백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왕청임이 남조역사를 통독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고의사는 더 자세하게 캐물었다.

 

고의사는 "당사의 처(妻)와 자식들이 당사의 시체를 해부했던가요? 그후에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하고 왕청임에게 물었다. 왕청임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당사의 처와 자식들은 당사의 시체를 해부했읍니다. 관부(官府)에서 당사의 처와 자식들에게 부정죄(不貞罪)와 불효죄(不孝罪)를 씌워 참수(斬首)하여 군중들에게 보였습니다."고 대답했다.

 

고의사는 "그런데 당신은 공동묘지에서 버려진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해부했지요? 관부에서 당신의 목을 자른다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왕청임에게 물었다.

 

왕청임은 고의사에게 "당신이 나를 위협하여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시체를 들짐승들이 뜯어 먹고 남은 것 만을 가지고 연구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사람이 나를 고발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사에 대하여 말하건대 사실 남조시대 당사는 잘못이 없소. 그리고 당사의 부인과 자식들도 잘못이 없소. 그 당시 보수적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 만이 당사가 잘못이라고 생각했오. 만일 6조 시대 부터 인체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었다면 현재 우리들이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서 고생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정정당당하게 시체 해부를 할 수 있을 것이오." 라고 감격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고의사는 조금도 양보하는 기색없이 "당신은 시체더미 속에서 해부학을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나 법으로 허용되지 않을 것이오" 라고 왕청임에게 말했다. 왕청임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당신은 당신 타잎의 의사이며 나는 계속 시체를 해부하여 인체해부학을 제대로 연구하고 싶소" 라고 고의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한 바탕 논쟁을 하다가 아무 결과도 없이 결국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왕청임은 사회적인 제지와 정신적인 압력을 많이 받아 상당히 심각해졌다. 가경(嘉慶) 4 년(서기 1799 년) 왕청임은 인체 해부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었다. 더군다나 성년의 시체해부였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양(遼陽)에 사는 어느 부인이 자기 남편을 죽였다. 관부에서는 남편을 살해한 부인에게 참수형과 할복(割腹) 사형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왕청임과 가장 친한 죽마고우가 형을 집행하는 망나니였다.  왕청임은 회자수(劊子手) 친구에게  "네가 형을 집행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느냐?  왜냐하면 내가 직접 내눈으로 성인의 5 장 6 부의 구조를 자세히 관찰하고 싶기 때문이다." 고 말했다.

 

왕청임의 친구는 왕청임으로 하여금 죄인의 시체 해부를 볼 수 있도록 쾌히 승낙하였다. 왕청임은 보기드문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다. 왜냐하면 왕청임은 사형집행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왕청임은 죄수의 목을 자르는 것과 배를 가르고 가슴을 쪼개어 심장을 꺼내고 해부하는 일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인현장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기뻤다. 물론 처참한 광경임으로 차마 두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다. 왕청임은 지금까지 횡격막의 진상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

 

왕청임의 친구는 그후에도 왕청임에게 다만 의사 자격으로 형장에 참가를 허가하여 시체를 해부하는 사형집행을 목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청임은 의사의 자격으로 구경만 해야 되므로 철저히 장부의 구조에 대하여 자세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욱이 횡격막의 모양에 대해서는 아리송했다. 그러다가 도광(道光) 9 년(서기 1829 년) 왕청임은 어느 환자의 집에 왕진을 가게되었다. 우연히 환자의 집에서 횡격막을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왕청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강녕(江寧)에 배치되어 있는 포정사(布政使) 사(謝) 모씨라는 사람인데 옛날에 서강(西疆) 작전에 참전했던 재향군인이었다.

 

그는 서강 전투 당시 수 많은 적군들을 살해햇으며 배가 갈라지고 터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인체내장의 각부 구조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림을 그려가며 왕청임에게 인체의 장부구조를 자기의 눈으로 본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왕청임은 사모씨의 성심성의 껏 설명하는 태도와 지식을 탐구하려는 정신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왕청임은 사람에 따라 다른 횡격막의 형태와 횡격막의 대소와 위치와 관계된 장부들 -폐, 간, 위장, 식도- 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왕청임은 큰 이익을 본 셈이다. 왜냐하면 40여 년간 횡격막에 대하여 쌓여있던 의혹이 풀어졌기 때문이다.

 

도광 10 년(서기 1830 년) 왕청임이 63 세 되던 해에 왕청임은 40여 년간 임상경험과 관찰에서 얻은 것들을 수집정리하여 한의학계에서 최초로 자세한 해부도가 첨가되어 있는 해부학전서(專書)인 의림개착(醫林改錯) 2 권(卷)을 편찬하였다. 의림개착 속에 25 폭의 장부도보(臟腑圖譜)가 들어 있으며 고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정(改正)하였다.

 

예를들면 고인들은 간(肝)이 일곱개의 소엽(小葉)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했으며 폐는 24 개의 기공(氣孔)과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직접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왕청임은 지적했다. 왕청임은 고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중요한 기관 즉 복대동맥(腹大動脈)과 상대정맥(上大精脈)과 신동맥(腎動脈)과 장위맥(腸胃脈)과 이장(胰臟) 등을 발견했다.

 

뇌수설(腦髓說)에 보면 "양이통뇌(兩耳通腦), 소청지성귀어뇌(所聽之聲歸於腦). 양목계여선장어뇌(兩目系如線長於腦), 소견지물귀어뇌(所見之物歸於腦), 비통어뇌(鼻通於腦), 소문향취귀어뇌(所聞香臭歸於腦). 소이소아무기성자(所以小兒無記性者), 뇌수미만(腦髓未滿). 고년무기성자(高年無記性者), 뇌수점공(腦髓漸空)."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두 귀는 뇌와 통한다. 그러므로 소리가 뇌에 전달된다. 두 눈 역시 뇌와 통하며 물건을 보면 즉시 그 물건의 영상이 뇌로 전달된다. 코도 뇌와 통하며 냄새를 맡는 것은 뇌와 관계된다. 어린 아이들이 사물 본성의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뇌수가 아직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고령의 노인들이 사물의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뇌수가 점차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는 뜻이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의림개착은 적지않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당시 역사배경과 사회환경 속에서 왕청임의 대담한 실험과 진실을 구하려고 노력한 그의 불굴의 정신은 인체 해부학과 한의학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후세 의학가들이 참으로 왕청임의 이러한 정신을 우러러 탄복하였다.

 

왕청임은 "의림개착은 질병치료를 위한 서적은 아니다. 장부와 관계된 것들을 기술한 책이다. 물론 그 중 불완전하고 정확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후세인들이 인체장부를 더 자세하게 관찰할 기회가 있으면 나의 책을 보충하여 더 훌륭한 해부학책을 만들기를 희망한다." 고 기록해 놓았다.

 

그의 겸손한 태도를 이 책 속에서 엿볼 수 있으며 그는 한의학사상 위대한 공헌을 한 의학가로써 오늘날 까지 인정받고 있다.


출처 : 구암등산카페
글쓴이 : 구암(具東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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