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경의 이름은 기(機)이며 자(字)는 행(行)이다. 동한 화평(和平) 원년(서기 150 년)에 남군(南郡) 남양현(南陽縣)에서 태어 났다. 현재 하남성 (河南省) 남양시(南陽市)이다.
남양은 동한(東漢: 서기 25 - 189)의 초대 임금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고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이 태어난 고장이라 하여 제향(帝鄕)이라고도 부른다.
장중경은 고향에서 소문 난 효자였으며 어렸을 때 부터 유가(儒家)의 경전(經典) 읽기를 좋아하였다. 남양의 동쪽에 동백산(桐柏山)이 둘러 서 있고 서쪽에 복우산(농산물이 풍요로운 곳이라서 자고로 이 고장을 부서지지(富庶之地)라고 불렀다. 부서지지란?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고장" 이라는 뜻이다.
천보적(天寶的)인 산수영기(山水靈氣)의 영향을 받아 남양에서 역대 재사(才士)가 많이 나왔다. 동한시대의 장형(張衡), 하응(何颙) 등을 비롯하여 육 칠십 명의 남양명사(南陽名士)가 배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장중경은 일반 대가(大家)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사서(四書), 오경(五經)을 각자의 집안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하루 종일 글 공부하는 학생들의 글읽는 소리에 온 동네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장중경은 원래 천부적으로 총명 한데다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틴에이저 때 이미 남보다 특출한 재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중경의 부모는 매우 기뻐하였으며 뒷날 장중경이 벼슬길에 오르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그래서 가문을 빛내고 조상들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중경은 광범위 하게 독서를 하여 노자(老子), 장자(壯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왕충(王充) 등 철학가들의 저서를 통하여 실력을 배양했다.
어느 날 장중경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눈을 돌렸다. 특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역사적인 고사(故事)에 관심이 쏠렸다. 사기 중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은 전국시대의 명의에 대한 고사였다.
편작이 괵국태자(虢國太子)를 기사회생(起死回生) 시킨 고사며 제환후(齊桓侯)의 기색(氣色)을 보고 앞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다는 것을 예측한 신비한 의술은 늘 장중경의 머리 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이러한 고사들이 장중경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미궁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사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장중경은 더욱 깊이 의학에 흥취가 생겨 몰입하게 되었다. 장중경은 더욱 많은 의학서적을 탐독한 후 스스로 연구하며 의학의 신비속을 헤맬 때 하나의 용납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자기도 편작과 창공과 같이 제세활인(濟世活人) 사업적인 의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장중경은 그들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한편 장증경의 부모는 중경이 장차 편작과 창공과 같은 길을 걸을까봐 근심 걱정에 쌓여 있었다. 그 당시 한대(漢代) 의학발전 상황을 보면 무술(巫術)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성행하던 때 였다. 통치자들도 의술을 일종의 천직(賤職)으로 보고 있었다. 더욱이 일부 용의(庸醫)들은 행의를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의술의 연마에는 아랑곳 없고 명리(名利))를 취하는데 만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의사들의 명예는 실추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이러한 때 임으로 대부분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의학을 배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하물며 장중경의 가정은 자손이 많은 대 가족이었기 때문에 장중경이 의사의 길을 택한다는 것에 대하여 장중경의 부모는 그대로 방관 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남양 일대에서 가장 학식이 풍부한 명사(名士) 하옹(何顒)이라는 문장가가 있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품성이 강직하였다. 동탁(董卓)이 정권을 잡았을 때 동탁이 하옹을 여러 차례 불러 고관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으나 그는 신병(身病)을 핑계로 고관자리를 사양했다. 그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고향에 머물러 은거생활을 하였다. 하옹은 유식하며 별별 세상 경험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중경이 16 세 때 중경의 아버지는 중경을 데리고 하옹에게 인사하러 갔다. 왜냐하면 중경의 아버지는 하옹이 박학다식함으로 중경의 전도(前途)를 예측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옹은 영리한 소년 중경을 매우 환영하였으며 중경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래서 하옹은 중경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할 수 있었다. 하옹은 장중경의 사정을 상세하게 이해하였다.
헤어지기 직전에 하옹은 장중경에게 "나는 너의 생각이 민첩하고 정세(精細)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노력하면 훌륭한 양의(良醫)가 될수 있는 충분한 소질이 있다고 확신한다." 고 말했다. 중경은 마음에 동요없이 침착하게 하옹의 말을 잘 들었다. 장중경은 "하옹의 입에서 이와 같은 말이 나오다니 ! 내가 정말 의학과 인연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한 끝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하옹은 중경이 마음의 충격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래서 하옹은 의미심장하게 "너는 분명 양의의 성품을 갖춘 사람이다. 나는 네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나아가기 바란다." 고 말했다.
하옹이 한 바탕 한 말은 중경에게 지혜를 불어 넣어 도를 철저히 깨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경은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하옹 선생에게 "선생님의 충고에 감사합니다." 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옹 선생을 만나뵙고 충고의 말씀을 들은 것이 중경의 인생 여정에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중경의 마음은 의학을 연구해야겠다는 신념으로 꽈차 있었다. 중경의 부모는 중경이 이미 굳게 뜻을 세웠으니 중경의 선택을 묵인하는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중경이 벌써 약관지년(弱冠之年)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계속 의학서적을 탐독하며 연구하였다. 그는 점점 제세활인지술(濟世活人之術)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명의의 의술을 전수 받아야 된다고 믿었다. 장중경이 가장 경모하는 편작은 장상군(長桑君)으로 부터 의술을 전수 받았고 창공은 공승양경(公乘陽慶)의 비적(秘籍)을 전수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한 시대에 각각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졌다.
장중경의 머리속에도 스승을 찾아 의술을 전수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남양 장씨 가문 중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장백조(張伯祖) 명의가 있었다. 남양 일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장백조는 의술이 고명하기 때문에 환자의 질병을 주도면밀하게 진단한 후 처방을 만들어 복용시키면 현저한 치료효과가 나타난다." 고 말했다.
장중경은 오랫동안 장백조의 이름을 경모해 왔었다. 장중경은 장백조를 찾아가 큰 절을 한 후 스승으로 모시기를 원했다. 장백조는 장중경과 동향(同鄕) 사람이며 같은 종씨의 웃어른이었지만 쉽게 응낙하지 않했다. 장백조는 장중경이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먼저 고찰했으며 그외 장중경이 의사의 자질이 있는지? 여러 방면에 걸쳐 살펴보았다. 그리고 난 후 장백조는 장중경을 제자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때 부터 장중경은 장백조를 정성을 다하여 스승으로 잘 모셨다. 장백조의 지도하에 소문(素問), 구권(九券), 81 난(難), 음양대론(陰陽大論)과 태려약록(胎臚藥錄) 등 의학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장중경은 새로운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장백조가 왕진 갈때 따라다니는 것이 장중경에게 가장 흥분된 시간이었다. 장중경은 장백조가 환자들에게 문병할 때 정중히 듣고 자세히 관찰하였다. 특히 장백조의 처방 용약하는 법을 반복하여 세심하게 사색하고 탐구하였다. 장백조가 질병을 분석하고 질병의 전변(傳變)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잘 들었다.
장중경은 배우는데 게으르거나 태만하지 않고 겸허한 태도로 가르침을 잘 받아 들였다. 수 많은 환자들이 장백조의 손에 의하여 병통(病痛)이 사라짐과 동시에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장중경은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장중경은 마음속으로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장백조는 장중경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장중경이 인애(仁愛) 정신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장백조는 장중경이 자기의 의술을 전수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어 매우 기뻤다. 어느 날 장백조는 자기가 평생동안 쌓아온 의료경험을 추호도 남김 없이 전수해 주고 어렵고 의심나는 곳을 반복해서 연습시켰다. 이제부터 환자 치료할 때 중경으로 하여금 실천해 보도록 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중경의 의학이론지식은 물론 임상능력이 높아졌다. 중경이 워낙 총명한데다가 하나를 알려주면 열개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백조의 칭찬을 받았다. 장중경이 장백조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후 장백조의 학술이론과 임상경험을 모두 전수받았으므로 젊은 청년 장중경은 남양 일대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중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편작과 같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편작은 산부인과 의사요 이비인후과 의사요 소아과 의사라고 생각 했으며 의술의 탐구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의술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연구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장중경은 생각했다.
장중경은 한편으로는 선배들이 써 놓은 의학서적을 읽고 명의들을 직접 찾아가서 배우고 질병치료에 유효한 처방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방관하지 않고 더욱 연구를 깊이하였다. 그 당시 의학계의 학풍은 부진한 상태였다. 많은 의사들의 각자 집안에서 집안으로 의술을 전수해주고 남들에게 의학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비밀에 부쳤다. 반면에 다른 의사들의 허물과 비밀을 들춰내서 공격하였다. 이러한 정황의 사회현실 속에서도 장중경은 여러가지 의술을 널리 받아들이기에 힘썼다.
장백조의 가르침을 받은 후 양려공(陽勵公)을 스승으로 모시었으며 그로 부터 임상경험을 많이 배웠다. 그 당시 또 양양(襄陽)에 성(性)이 왕씨인 외과의사가 있었다. 그는 등창치료에 정통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의사를 "왕신선(王神仙)" 이라고 불렀다. 장중경이 이 소문을 듣고 즉시 한약 주머니를 어깨에 들쳐메고 수 백리 길을 걸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길을 고생을 무릅쓰고 달려갔다. 그리고 장중경은 왕의사에게 넓죽 절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왕외과의사는 사실은 장중경의 이름을 전에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왕의사는 장중경과 같이 대단히 명성이 있는 의사가 자기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인사하며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의아하였었다. 그러나 왕의사는 후에 배우기를 간절히 바라는 장중경의 말을 듣고 또 예의바르고 공손한 그의 태도와 유명한 사람 처럼 표정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누그러 졌다. 또 왕의사는 장중경이 의술을 배워서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함이 전혀 없음에 대하여 오히려 머리가 수그러졌다. 그래서 왕의사는 자기의 수 십년 동안 누적해 온 임상경험을 모두 장중경에게 전수했다.
장중경은 이와 같이 고난을 무릅쓰고 명리를 초월하여 각가(各家)의 치료경험을 수집하고 새로이 많은 방제를 만들었다. 방제의 효과는 신효막측하였다. 그 중 가장 유효한 방제들을 골라내어 의학계에 공개하였다. 많은 의사들이 장중경의 처방을 사용하여 수 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했다. 편작과 같이 장중경의 명성이 일시에 세상에 떨쳐졌다. 몇 십년이 지난 뒤 하옹은 낙양에서 두번째 장중경을 만났다. 그때 장중경은 중원(中原)의 명의로 소문이 나있었다.
중원은 황하의 중류와 하류에 걸친 지역으로 하남성 대부분과 산동성 서부 및 하북성과 산서성 남부를 포괄하고 있었다. 하옹은 감개무량하여 "중경지술정어백조(仲景之術精於伯祖), 기병지험(起病之驗), 수귀신막능지지(雖鬼神莫能知之), 진일세지신의야(眞一世之神醫也)." 라고 장중경을 극구 칭찬하였다.
다시 말하면 "장중경의 의술은 장백조의 의술보다 뛰어나고 귀신도 알지 못하는 병을 알아내니 정말로 이 시대의 신의(神醫)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는 뜻이다.
동한(東漢) 때 한의학은 대단히 발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무의(巫醫)의 영향이 컸다. 백성들이 병에 걸리면 무당은 믿어도 의사는 믿지 못하는 풍습이 있었다. 무의와 한의사들 간에 투쟁은 있었다. 장중경은 무의들의 사기술과 그 해독에 대하여 통탄하였다.
장중경은 "궐신이폐(厥身已斃), 신명소멸(神明消滅)" 이라고 반복해서 선전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미신과 귀신을 믿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장중경은 임상 실천중 고명한 의술을 믿고 무의와 싸웠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무의들의 속임수에 꾀어 넘어가지 말라고 권유했다.
남양 부근에 살고있는 한 부녀자가 괴병에 걸려 때때로 슬피 울었다. 온 몸을 덜덜 떨며 허튼소리를 지껄인다. 어떤 때는 안정된 상태이며 어떤 때는 정신이 멀쩡했다가 또 어느 때는 정신이 몽롱했다. 가족들은 귀신 씌웠다고 생각했음으로 급히 무파(巫婆)를 초청하여 환자로 부터 귀신을 쫓아내게 하였다. 신들린 무파는 노래하고 춤추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나서 환자에게 부적을 담근 물을 한 대접 마시도록 하였다. 무파가 소란을 떨고 난 며칠 후 환자의 병정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때마침 장중경이 이 집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는 장중경의 이름을 평소부터 경모해 왔기 때문에 즉시 장중경에게 환자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장중경은 환자의 진맥부터 하였다. 그리고 나서 환자의 병태를 자세히 관찰하였다. 집안 식구들에게 환자의 발병원인에 대하여 몇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난 후 장중경은 마음속에 이미 전반적인 치료계획이 서 있었다. "이 환자의 병은 장조증(臟躁症)이라고 부릅니다. 귀신이 앙화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무파는 병의 치료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무당에게 계속 의지한다면 그때는 후회하여도 이미 때는 늦을 것입니다." 고 말했다.
장조증은 현대의 억병(癔病)과 같다. 그리고 나서 장중경은 금침(金針)을 꺼내어 몇 군데 환자에게 침을 놓았다. 잠시 후 환자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났다. 장중경은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 몇 첩을 지어 주었다. 환자는 감맥대조탕 몇 첩을 달여서 복용한 후 병이 완치되었다.
당시 의학계에서는 어떤 환자가 나타나면 의사들은 적당한 처방을 만들어 융통성 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치료하였다. 질병을 분별하지 않고 치료하기 때문에 치료효과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장중경은 수 십년 동안 임상경험을 통하여 꾸밈없이 정반(正反) 양방면의 변증법으로 치료하였다. 그리고 이중구동(異中求同)과 동중구이(同中求異)의 진료방법을 잘 이용하여 치료효과가 매우 높았다.
어느 날 두 형제 아이들을 진찰했다. 두 아이들의 아버지는 두 아이가 모두 똑같이 열이있고 두통이 있는데 이미 몇몇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중경이 진맥 후 자기 손으로 아이들의 피부를 만져보았다. 그중 형 아이의 피부는 건조하고 땀이 없었으며 맥상(脈象)은 부긴(浮緊)이었다.
동생 아이의 피부는 땀이 있었고 맥상은 부완(浮緩)이었다. 그래서 장중경은 형 아이에게는 마황탕(麻黃湯)을 복용시키고 동생 아이에게는 계지탕(桂枝湯)을 복용시켰다. 이전에 이 두 형제 아이들을 치료했던 의사들이 장중경의 처방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두 형제의 질병은 같은 종류의 질병이 분명한데 어째서 두 가지 다른 약을 각각 사용하여 치료하는 것인가? 이 두 아이들은 장중경의 처방약을 복용하고 이틀 후에 모두 질병이 완치되었다. 전에 두 형제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두 형제가 장중경의 처방약을 복용하고 병이 완치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장중경에게 몰려와서 큰 절을 하고 "스승님! 저희들에게 가르침을 바랍니다." 고 말했다.
장중경은 "병수동이증유이(病虽同而症有異), 고기치불가고수일방(故其治不可固守一方), 양해수사수동(兩孩受邪虽同), 단전해속표실무한(但前孩屬表實無汗), 의용마황탕발구사(宜用麻黃湯發汗驅邪), 후해속표허다한(後孩屬表虛多汗), 용계지탕조화영위(用桂枝湯調和營衛), 해기거사(解肌祛邪). 아정시변별병인적구체정황(我正是辨別病人的具體情況), 이후대증하약(而後對證下藥), 재능약도병제(才能藥到病除)." 라고 설명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병이 비록 같지만 증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치료할 때 한 가지방(方) 만 고집을 부리고 사용하면 않된다. 두 아이는 비록 같은 병사가 인체내로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형 아이는 표실이며 땀이 없다. 그러므로 마황탕으로 발한시켜 병사를 몰아내는 것이 적합하다.
동생은 표허다한 이므로 계지탕을 써서 영위를 조화시켜 주어야 된다. 그러면 근육이 풀리면서 병사를 몰아낸다. 나는 환자의 구체적 정황을 분별하여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쓴다. 그러면 질병이 잘 치료된다." 는 뜻이다.
모든 의사들은 장중경의 의술에 탄복하였다. 장중경의 이와 같은 진료과정으로부터 변증논치(辨症論治)라는 새로운 치료원칙이 확립되었다. 장중경은 또 장기 임상경험 중 전염성 질병의 치료를 통하여 풍부한 실력을 쌓았다. 전염성 질병의 사(邪)는 즉 치병인소(致病因素)는 왕왕 전변(傳變)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므로 용약(用藥)에 있어서나 제량(劑量)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해야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많은 의사들이 전염성 질병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오치(誤治)한 후 다시 치료하려고 하나 실패하고 만다. 이 방면에 장중경은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장중경이 과수원 옆을 지날 때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따라 돌아서 집앞으로 갔다. 다 부셔져 가는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한 노파가 문가에 기대서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통곡하고 있었다. 장중경은 노파 앞으로 다가서서 울고 서 있는 이유를 물었다.
노파는 울음을 멈추고 장중경을 바라보며 "선생님! 의사를 초청할 돈이 쉽게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우 돈을 장만하여 의사선생님을 초청하여 치료했으며 처방약을 달여 복용시켰는데도 손자 아이는 아직도 땀이 멎지않는 구려! 손자 아이는 바람을 싫어하고 추운 것도 싫어하고 팔다리에 쥐가 가끔 나고 팔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기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넋아나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 설명해주었다.
장중경은 노파의 손자가 상한병을 앓고 있음을 알았다. 그 노파는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 노파의 슬하에 외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두 젊은 부부는 역병으로 모두 죽고 말았다. 그래서 노파는 손자를 데리고 단 둘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밖에 없는 손자마저 죽으려고 하니 할머니는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장중경은 그 노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장중경은 가난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수없이 치료해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장중경은 그 아이의 병정을 물은 후 즉시 방안으로 들어가 손자 아이를 진찰했다. 장중경은 지난번에 손자를 치료했던 다른 의사가 계지탕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았다. 장중경은 계지탕에 부자(附子)를 가미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즉시 달여 손자에게 복용시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장중경은 다시 노파의 집에 손자를 보살피기 위하여 방문하였다. 노파의 손자는 이미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장중경은 다년간 임상실험 결과 표증체허(表證體虛)로 인한 발한태과지증(發汗太過之證)에 계지탕이 유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중경이 50 세 쯤 되었다.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거닐고 친구도 만나 환담하려고 여행을 떠났다. 사람들은 장중경의 의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중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고 복종하였다.
어느 날 장중경은 형주(荊州) 군벌(軍閥) 유표(劉表)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다. 우연히 방년 20 세 쯤 되어 보이는 청년문학가 왕찬(王粲)을 만났다. 왕찬의 자(字)는 중선(仲宣)이었다. 그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써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 당시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등루부(登樓賦)의 저자이다. 후에 조조(曹燥)의 막료(幕僚)가 되었는데 장중경은 왕찬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왕찬의 얼굴에 남다른 기색(氣色)을 발견하였다.
장중경은 왕찬의 체내에 이미 려병(疠病)의 병원(病源)이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장중경은 일개 의사로써 마당히 해야될 일이기 때문에 왕찬 앞에서 "당신의 체내에 려병(현대의 마풍병(麻風病):Hansen 씨병)의 병사가 잠복해 있소.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당신의 나이 40 세 좌우에 분명히 먼저 눈썹이 빠지기 시작하며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반년 후에 생명이 위험할 것이오. 지금 즉시 약을 복용하면 내가 볼때 당신의 생명은 구해질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장중경은 오석탕(五石湯) 한 첩을 지어 왕찬에게 주었다. 왕찬은 본래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 주의를 돌리지 않는 타고난 품성이 있었다. 왕찬은 장중경의 하는 말을 들은 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물론 장중경이 지어 준 한약을 복용할리가 없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3 일이 지나갔다. 장중경은 왕찬을 만나러 갔다. 장중경은 왕찬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가 지어 준 약을 복용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왕찬은 "당신이 지어 준 한약을 이미 복용했습니다." 고 장중경에게 대답하였다.
장중경은 왕찬의 얼굴 기색을 자세히 관찰하고 난 후 정색을 하며 "당신의 얼굴 기색이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오. 당신은 분명히 내가 지어 준 약을 복용하지 않았오. 나는 일부러 과격한 말을 하여 남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아니오. 지금 병마가 당신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이 아깝지도 않단 말이오." 라고 왕찬을 꾸짖었다.
그래도 왕찬은 반신반의하며 장중경의 말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20 년 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왕찬은 과연 병이 생겨 먼저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반년이 지난 후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상의 고사는 황보밀(黃甫謐)의 저서 "갑을경(甲乙經)" 에 기재되어 있다.
황보밀은 장중경의 의술을 경복한 나머지 "수편작창공무이가야(雖扁鵲倉公無以加也)" 라고 경탄하였다.
다시 말하면 "설사 편작과 창공일지라도 장중경 보다 이 이상 더 잘 할래야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는 뜻이다.
장중경은 다년간 무한한 노력을 통하여 옛 사람들의 교훈을 배우고 여러가지 처방을 널리 받아들여 결국 자신의 숙원을 실현하여 편작과 창공과 같은 일대 명의가 되었다.
장중경이 생활하던 동한 시대 말기는 중국 역사상 지극히 시끄러운 시대였다. 통치 계급내부에서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고 반대파의 정치활동을 금하게 하는 다툼이 계속되었다. 군벌과 호강(豪强)들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중원(中原)을 제패하기 위하여 다투었다. 농민들은 여기 저기서 의거(義擧)를 일으켰다. 일시에 전란이 빈번히 일어나 백성들은 계속해서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이리 저리 도망가야만 했다. 전란으로 인하여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동탁이 헌제를 협박하여 장안으로 옮기게 하고 낙양지구 백만 시민들로 하여금 장안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그 당시 낙양에 궁전(宮殿)이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낙양 주위로 사방 2 백리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전란으로 인하여 인구가 대폭 감소되었으며 전원(田園)은 황폐해 졌다. 거기에다 설상가상격으로 연속 가뭄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 농작물이 물에 침수되고 농사에 해를 끼치는 황충(蝗蟲:누리) 마저 번성하는 등 자연재해가 극심했다. 백성들은 의식(衣食)을 해결하지 못하고 굶어 죽어 온 들판에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왕찬의 칠애시(七哀詩)는 그 당시 정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출문무소견(出門無所見), 백골폐평원(白骨蔽平原)"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백골 만 온 들판을 덮고 있구나!"
자고로 이러한 천재지변에는 반드시 역병이 유행되었다. 사기에 보면 동한 환제(桓帝) 때 역병이 세 차례, 영제(靈帝) 때 다섯 차례 그 중 헌제 건안(建安) 년간에 유행했던 역병이 가장 심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병마가 휩쓸고 지나 간 후 열집 중 아홉 집은 사람이 없는 텅빈 집이었다. 동한 영제(서기 168-서기 188)가 통치하던 중 서기 171 년, 서기 173 년, 서기 179 년, 서기 182 년, 서기 185 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최대규모의 역병이 유행되었다. 그 당시 역병 유행의 비참한 광경을 조식(曹植)은 그의 저서 설역기(說疫氣)에
"가가유강시지통(家家有僵尸之痛), 호호유호읍지애(戶戶有號泣之哀), 혹합문이에(或闔門而殪), 혹복족이상(或複族而喪)."
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매집 마다 썩지않고 굳어 진 송장을 보고 가슴아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구나!
어떤 집은 온 식구가 전부 죽어 문이 닫혀있고 어떤 곳에선 겹쳐서 초상이 난 집도 있었다."
는 뜻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역병으로 인한 비참한 광경을 짐작할 수 있다.
남양(南陽)지구에도 역병이 대 유행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역병으로 죽어갔다. 장중경의 가족은 본래 대 가족이었으며 약 200여 명의 친척이 있었다. 건안초년 이래로 10 년 동안에 장중경의 가족 중에서 133 명이 역병으로 죽었다. 133 명의 사망자 중 상한병으로 죽은 사람은 93 명이었다.
온역병(溫疫病)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박해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보고 장중경은 비분강개하였다. 장중경은 또 백성들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게 한 통치자들의 부패를 통탄하였다. 한편 많은 의사들은 이때 권세 있는 자들에게 나아가 아부하며 빌붙어 먹고 살았다. 이러한 의사들은 오직 명예와 이익을 추구할 뿐 백성들의 질병을 더욱 잘 치료하기 위한 의학의 연구는 중요시 하지않았다. 장중경은 이와 같은 많은 의사들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평론형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보냈다.
즉 "관금지의(觀今之醫), 불염사구경지(不念思求經旨), 이연기소지(以演其所知), 각승가기(各承家技), 시종순구(始終順舊), 성질문병(省疾問病), 무재구급(務在口給), 상대사수(相對斯須), 편외탕약(便外湯藥)." 이라고 써서 의사들에게 전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날 의사들은 의학의 본래 목적과 취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범위내에서 만 실력을 발휘하지 더 연구를 하지 않고 그와 같은 의술을 자식에게 전수하며 시종 옛 것만을 고수하고 질병에 대하여 묻고 대충 살핀 다음 그저 편리하고 부작용이 적은 탕약만을 제공한다." 는 뜻이다.
장중경은 상한병과 역병의 치료법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시켜 연구에 몰두하였다. 건안년간에 장중경은 행의를 하며 전국 각지로 돌아다녔다. 상한병과 각종 유행병이 나쁜 결과를 가져옴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래서 장중경은 자신의 다년간 상한병에 대한 연구를 실천에 옮길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 결과 더욱 풍부한 경험으로 인하여 상한병을 인식하는데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 그 당시 상한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장중경은 자신의 실제 실험과 경험을 토대로 저서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다. 제세활인 정신으로 고생을 참고 견디며 수 십년간 노력하여 불후의 명작(名作) 의서인 "상한잡병론" 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황제내경이 편찬된 이래 가장 훌륭한 의학서적이다. 서기 205 년 상한잡병론 원본 16 권이 완성되었다. 장중경이 일생동안 심혈을 경주하여 편찬한 책이다. 그 당시 인쇄공장이 아직 없던 때라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원고를 붓으로 베껴쓰는 수 박에 없었다. 그래서 폭넓게 전수되지 못했다. 또 전쟁 중에 분실된 것도 많았다.
수(隋)나라 때 저서 경제지(經濟志)에 보면 "변상한십권망(辨傷漢十卷亡)"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상한잡병론 16권 중 10권이 민간에 유산(流散)되어 없어졌다." 는 뜻이다.
상한잡병론 16 권을 모두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략 상한잡병론이 완성된지 60 년 내지 70 년 후 서진(西晉) 태의령(太醫令) 왕숙화(王叔和)가 분실된 상한잡병론 중 상한론 부분 만을 수집하여 상한론을 재편찬하였다. 그래서 광명한 새 세상을 보게되었다.
왕숙화가 발견한 필사본(筆寫本)인 초본(抄本)은 이미 한쪽이 없어져 손실된 파본(破本)이었다. 왕숙화가 몇년 동안 재정리하여 상한론 부분을 순서에 따라 다시 배열해 놓았다. 왕숙화는 상한론의 수집과 보존과 유전(流傳)에 있어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왕숙화(서기 210 년-서기 285 년) 는 서진(西晉:서기 265 년-서기 316 년) 고평(高平: 현재 산동성 제영시(濟寧市)) 사람이다. 왕숙화는 내경과 난경의 맥학논술과 편작과 화타와 순우의와 부옹(부翁)과 장중경 등 의가의 맥학논술을 참고하고 자기 자신의 임상경험을 결합하여 맥학(脈學) 10 권을 저술한 서진의 가장 저명한 의학가였다.
서영태(徐靈胎)는 "불유숙화(不有叔和), 언유중경(焉有仲景)"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왕숙화가 없었더라면 어찌 장중경이 있겠는가?" 라는 뜻이다.
서영태는 청나라 때 명의로써 태의원 태의를 지낸 사람이며 의학원류론(醫學源流論)과 상한유방(傷寒類方)을 저술하였다.
왕숙화 후 수 백년 동안 지내오다가 송나라 때 임억(林億) 등을 위시한 여러 학자들이 추가교정을 다시 보고 난 후 조정에서 상한론을 대량으로 간행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송(北宋) 초년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수(王洙)가 한림원에 소장되어 있는 파손되어 남아있는 불완전한 잔여 고서적 중 금궤옥함요약방(金匱玉函要略方)의 일부를 발견했다. 세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상한을 논한 책이고 중권은 잡병을 논한 책이며 하권은 방약과 부과병(婦科病) 치료법을 논한 책이었다. 이 책은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의 발췌본(拔萃本)이었다.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佑) 2 년(서기 1057 년)에 조정내에 의약서적을 교정(校訂)하고 편사(編寫)하며 간행(刊行)하는 의서교정국(醫書校正局)을 설립하고 의학부문에 경험이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그중 임억, 고보형(高保衡), 손기(孫奇), 손조(孫兆)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의학서적을 정리하고 교정하였다. 금궤옥함요약방을 교정할 때 이미 전해 내려오는 상한론을 본보기로 삼아 교정했다. 그리고 신편금궤요약방론(新編金匱要略方論)이라고 책 이름을 부쳤다. 간단히 금궤요약이라고 칭한다.
영종(英宗) 치평(治平) 2 년(서기 1065 년)에 정식 출판하여 송판본(宋版本)이 되었다. 송판본은 영종의 연호를 따서 "치평본" 이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장중경의 원저 상한잡병론이 왕숙화가 재편찬한 상한론과 임억등이 재정리 편찬한 금궤요약의 두 권으로 나누어져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상한잡병론은 진한(秦漢) 이래 의약이론을 대성한 책이다. 아울러 의료실천 전문서적이며 한의학 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고전임과 동시에 임상치료학 방면의 일대거작(一大巨作)이다.
후세 의가에서 상한잡병론의 방제들을 "중방지조(重方之祖)" 라고 불렀다.
다시 말하면
"상한잡병론 속에 들어 있는 방제는 모든 처방의 원조(元祖)다."
는 뜻이다.
상한잡병론은 우선 한의학의 변증논치의 기본법칙을 확립하여 발전시켰다는데 큰 공헌이 있다. 장중경은 질병발생과 질병의 발전과정 중 나타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부문에 근거하여 파악했다.
첫째 병사가 경락과 장부에 침입하는 깊이의 정도
둘째 환자의 체질의 강약
셋째 환자의 정기(正氣)의 성쇠(盛衰)
넷째 병세의 진퇴완급(進退緩急)
다섯째 구병(舊病)이나 숙질(宿疾)의 유무 등 모든 가능한 정황을 따져서 종합 분석하고 발병의 규율을 찾아내고 부동(不同) 정황하에서 치료원칙을 확립시켰다.
장중경은 외감열성병(外感熱性病)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증상은 6 개 증후군과 8 개 변증강령(辨證綱領)에 귀납시켜 분류했다. 6 경 (태양, 양명, 소양, 태음, 궐음, 소음)으로써 질병발전 과정 중에 나타나는 전변(轉變)을 분석하고 8 강(음양, 표리, 한열, 허실)으로써 질병의 속성과 병위(病位)와 사정소장(邪正消長)과 병태의 출현 등을 변별했다. 병정분석이 확립되고 임상치료의 법도를 알게 됨으로써 장중경은 모든 외감열병을 비롯하여 임상각과의 진료규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장중경은 후세 의가들의 임상실천의 기본규칙을 마련해주었다.
변증(辨證)이란? 임상상에 나타나는 각종 병정을 8 강과 6 경에 비추어 고찰한 후 귀납시켜 증후를 진단하는 것을 말하며 논치(論治)란? 병정의 성질과 병변부위와 증후의 완급과 경중(輕重), 임시변통의 선후대책과 치료법칙을 제정한 다음 처방을 만들고 처방에 의하여 약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변증논치는 실제로 한의학에서 병정을 진찰하여 치료하는 최고원칙이다. 변증논치의 진료체계에 따르면 천변만화하는 질병의 증상 일지라도 모두 다스릴 수 있다. 장중경은 이와 같이 병정을 분석하는 법을 확립하고 질병의 증후감별법과 임상치료의 법칙을 창안해 냈다. 이로 인하여 일체의 외감열병의 진료법칙뿐만 아니라 임상 각과의 진료법 원칙을 발견해 냄으로써 후세 의가들에게 임상실천의 기본표준을 마련해 주었다.
상한론에 113 개의 방제가 수록되어 있으며 금궤요약에 262 개의 방제가 각각 수록되어 있다. 중복된 방제를 빼고나면 두 권의 책속에 총 269 개의 처방이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장중경의 저명 방제 중 현대 의학의 임상치료에서 크게 작용을 발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들면 B 형 뇌염(腦炎)은 백호탕(白虎湯)으로. 폐염은 마황행인석고감초탕(麻黃杏仁石膏甘草湯)으로, 급만성맹장염(急慢性盲腸炎)은 대황모단피탕(大黃牡丹皮湯)으로, 담도회충(膽道蛔蟲)에는 오매환(烏梅丸)으로, 이질에는 백두옹탕(白頭翁湯)으로, 급성황달형간염(急性黃疸型肝炎)에는 인진호탕(茵陳蒿湯)으로, 부정맥(不整脈; Arrhythmia)에는 자감초탕(炙甘草湯)으로, 관심병심교통(冠心病心絞痛)에는 괄루해백백주탕(括蔞薤白白酒湯)으로 각각 치료하고 있다.
이상의 방제들은 현대 임상치료 중 상용되는 양방(良方)이다.
또 세계에서 인공호흡법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도 장중경이라는 사실을 서양에서는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
상한잡병론에 보면 침자(針刺), 구락(灸烙), 온위(溫熨), 약마(藥摩), 취이(吹耳) 등 치료방법도 여러가지 수록되어 있다. 그외 구급방법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자액(自缢)과 식물 중독의 치료방법은 특색이 있다. 목을 매어 자살한 사람이나 목을 졸라 죽은 사람의 경우 살려내는 구급법은 현대인공호흡법과 똑같다.
청나라 때 명의 장지총(張志聰)은
"불명사서자불가이위유(不明四書者不可以爲儒), 불명상한론자불가이위의(不明傷寒論者不可以爲醫)"
라고 과격한 말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
사서(四書) 즉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유학자가 될수 없고
상한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사가 될 자격이 없다."
는 뜻이다.
장지총은 상한론종인(傷寒論宗印)과 상한론집주(傷寒論集注) 등을 저술하였다.
상한론은 해외로 널리 보급되었다. 진(晉)나라 때 부터 현재 까지 1800여 년간 상한잡병론은 세계 여러나라로 보급되어 주석되고 다시 정리하고 연구를 더하여 가고 있다.
일본에선 강평(康平) 년간 (송나라 때) 이래로 상한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숫자가 200 명을 헤아린다.
그외 한국, 월남, 인도네시아, 싱가폴, 몽고, 인도, 태국, 말레시아 등지에서도 한의학자들이 상한론을 연구하여 자국의 의학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상한론과 금궤요약은 전 세계 각국의 한의과 대학에서 중요한 기초과목으로 개강되고 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을 보면 장중경은 상한잡병론 외에도 변상한(辨傷寒) 10 권, 평병약방(評病藥方) 1 권, 요부인방(療婦人方) 2 권, 오장론(五臟論) 1 권, 구치론(口齒論) 1 권을 저술했는데 애석하게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나마 상한잡병론 한 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장중경은 세계 의학계에서 위대한 의학가로 추앙 받고 있다. 장중경의 처방들은 세상 사람들을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켜 줌으로써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장중경은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장중경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은 두도(杜度)와 위신(衛迅)이었다. 이 제자들은 후에 유명한 의학자가 되었다. 장중경의 방론서(方論序)에 보면 "두도(杜度), 부지하허인야(不知何許人也), 중경제자(仲景第子). 식견굉민(識見宏敏), 기우충심(器宇沖深), 담어교긍(淡於驕矜), 상어구제(尙於救濟), 사중경(事仲景), 다획금방(多獲禁方), 수위명의(遂爲名醫)."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두도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나 장중경의 제자였다. 식견이 해박하고 심오했으며 용모가 겸허하였다. 장중경을 스승으로 잘 모셨으며 의술을 배우고 많은 금방을 얻었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명의가 되었다." 는 뜻이다.
또 일설에 의하면 두도는 경조(京兆) 두능(杜陵) 사람이다. 위(魏) 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제(齊) 나라의 재상(宰相)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그러나 관직을 버리고 장중경을 스승으로 모시어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 722 권에 보면 "위신(衛迅), 호의술(好醫術), 소사중경(少師仲景), 유재식(有才識). 찬사역삼부궐경(撰四逆三部厥經), 급(及) 부인태장경(婦人胎臟經),소아로신방(小兒颅顖方) 삼권(三卷), 개행어세(皆行於世)."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위신은 의술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부터 장중경을 스승으로 모시어 많이 배워 지혜와 재능이 뚸어났다. 위신은 사역삼부궐경과 부인태장경과 소아로신방 세권을 편찬하여 세상에 모두 퍼뜨렸다." 는 뜻이다. 그러나 이 세권의 책은 모두 도중에 분실되고 말았다.
장중경은 두도와 위신과 같은 훌륭한 제자들의 도움으로 위대한 상한잡병론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장중경은 소문에 기록된 "부열병자(夫熱病者), 개상한자류야(皆傷寒之類也), 인지상어한야(人之傷於寒也), 즉위열병(則爲熱病)." 의 이론에 근거하여 상한학설을 창립 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릇 열병환자는 대부분 상한 종류이다. 사람은 대개 한으로 인하여 병들며 곧 열병이 된다." 는 뜻이다. 후세 의가들이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장중경의 상한학설을 그대로 계승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학식과 임상경험을 상한학설과 결합하고 보충하여 상한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상한학파들은 부단히 연구를 계속하였다. 역대 의가 중 700여 명의 상한학파가 있었으며 그들이 저술한 책은 일 천 여종을 초과하며 한의학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상한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송금(宋金) 시기의 방안상(龐安常)은 상한총병론(傷寒總病論)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질병의 원인과 발병후 질병의 진행과정을 명백하게 설명해 놓았다. 질병의 원인을 한독(寒毒)과 이기(異氣)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굉(朱肱)의 저서 남양활인서(南陽活人書)에서는 삼음(三陰)과 삼양(三陽)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생겨 질병이 발생한다는 경락지설을 주장했다.
허숙미(許叔微)는 상한구십론(傷寒九十論)에서 임상에서 나타나는 증상에 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성무기(成無己)의 저서 주해상한론(注解傷寒論)은 상한론을 계통적인 이론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책은 현존하는 상한론주석본(傷寒論註釋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상은 송금시대의 상항학파들의 연구 실적이었다.
명청시대에 들어와서 상한학파들 사이에 학술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어 파가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논쟁결과 상한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크나큰 발전을 가져왔다.
방유집(方有執)의 상한론조변(傷寒論條辨), 정교천(程郊倩)의 상한론조변직해(傷寒論條辨直解), 진수원(陳修圓)의 상한론천주(傷寒論淺注)와 상한의결관해(傷寒醫訣串解), 가운백(柯韻伯)의 상한래소집(傷寒來蘇集), 우재경(尤在涇)의 상한관주집(傷寒貫珠集), 심금오(沈金鰲)의 상한론강목(傷寒論綱目), 전황(錢璜)의 상한소원집(傷寒溯源集) 등등 일일이 예를 모두 들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상한학파의 발전으로 인하여 역대 한의학이 부단히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혁혁히 빛나는 역사적인 공적을 이루었다. 청나라 때 상한학파의 발전으로부터 하나의 신학술학파인 온병학파가 생겼다. 상한의 개념은 광의(廣義)와 협의(狹義)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협의의 상한은 한사(寒邪)가 인체내로 침입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광의의 상한은 모든 외감병을 일컫는다. 상한잡병론은 외감성 열병과 잡병 치료의 임상치료학에 관한 거작이다.
난경(難經)에 보면 "상한유오(傷寒有五), 유중풍(有中風), 유상한(有傷寒), 유습온(有濕溫), 유열병(有熱病), 유온병(有溫病)"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광의의 상한을 말한다.
상한잡병론에는 한사를 받아 질병이 생기는 협의의 상한과 열사를 받아 질병이 생기는 광의의 상한이 있다. 한나라 때 이후로 장중경의 학설만큼 한의학에 크나 큰 영향을 준 학설은 없었다. 장중경은 임상치료학의 규범(規范)을 창립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장중경은 한의학 임증(臨證)의 준칙을 만들었다. 즉 병을 진찰하여 약을 처방하는 규칙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예를 들면 현재 까지 한의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1) 환자의 진술 내용을 참고하여 진단에 적용하는 방법
(2)정체관념의 인식에 입각한 변증논치의 방법
(3)급성전염병 치료에 있어서 순환계통의 상황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치료하는 방법
(4)승기탕(承氣湯), 저당탕(抵當湯), 대함흉탕(大陷胸湯) 등을 배독요법(排毒療法)에 응용하는 방법
(5)수질(水蛭)과 맹충(蝱蟲) 등 동물성 약의 응용
(6)인삼의 입약(入藥)과 인삼탕과 서여환(薯蓣丸)과 소건중탕(小建中湯) 등을 영양요법에 응용하는 방법 등은 모두 장중경이 심혈을 경주한 지혜의 소산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장중경은 의사들은 물론 온 백성들로 부터 영원토록 존경을 받고 있다. 당나라 때 감백종(甘伯宗)의 저서 명인전(名人傳)과 송나라 때 임억(林億)의 상한론서(傷寒論序)에 보면
"장중경은 한나라 영제(靈帝) 때 효염(孝廉)으로 추대되었으며 건안중(建安中:서기 196-서기 219)에 장사태수(長沙太守)를 역임한바 있다. 장중경이 한의학에 공헌한 사실은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기록되어 있다.
장중경의 학술사상과 의학에 심혈을 경주한 숭고한 정신은 1800여 년 동안 한의학의 진로(進路)를 밝혀주는 등대 역할을 해왔으며 한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투 노력하여 연구케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장중경 보다 다섯살 연상인 화타(華타:서기 145-서기 208) 역시 상한잡병론을 읽고나서 "저진시일본구활인명적호서(這眞是一本救活人命的好書)" 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진실로 상한잡병론이야말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서적이다."는 뜻이다. 화타는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을 읽고 난 후 3 년이 지나서 세상을 하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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