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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비법

[스크랩] 명의 성인(盛寅)

성인의 자(字)는 계동(啓東)이며 오강(吳江)태생이다. 대원례(戴元禮)의 제자 왕빈(王賓)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師事) 했으며 후에 왕빈의 추천으로 대원례의 문하생이 되었다. 내경(內經)을 비롯하여 모든방서(方書)를 탐독하고 명의가 되었다.

 

성인은 명나라 제 3 대 임금 성조(成祖:서기1403-1424) 때 공교롭게 범죄와 연루되어 남경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시(內侍) 들에게 있는 병을 잘 고친다는소 문을 듣고 성조가 성인을 불러 면담해 보았다. 과연 성인의 의술이 고명한 것을 알고 왕은 성인의 죄를 사면시켜서 출감시키고 곧 바로 남경태의원 어의에 임명하였다.

 

성조 19 년(서기1421년)에 도읍을 남경에서 북경으로천도 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명나라의 서울은 남경과 북경 두 군데 있었다.

 

성인이 어느 날 궁안에 있는 어용약방으로 출근하는 도중에 갑자기 어지럽고 두통이 심하여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태의들이 달려와서 진맥하고 약을 써서 치료해 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태의들은 성인의 병이 무슨 병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태의가 아닌 어느 주방낭중(走方郎中)이 약을 한 첩 올려 즉시 끓여 성인에게 복용시켰다. 성인은 그 약을 복용하자마자 바로 깨어났다.

 

주방낭중은 "원래 태의 성인은 그 날 아침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태의원으로 달려가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위기(胃氣)가 허약한 상태에 있었는데 태의들이 빈속에 여러 가지 한약을 성인에게 복용시켰으므로 한약을 위에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태의 성인은 여러가지 한약의 독으로 인하여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고 어의들에게 설명했다.

 

모든 약을 해독시키는데는 감초가 제일이다. 그래서 주방낭중은 감초 한 가지 만을 해독제로써 끓여서 성인에게 복용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한의학은 수 천년 동안 질병과 투쟁해 온 경험들의 총 집결로써 위대한 보고(寶庫)라고 말 할 수 있다. 민간에서 사용되는 단방(單方)과 험방(驗方)들이 보충 역할을 함으로써 한의학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제 4 대 왕 인종(仁宗:서기1425)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고 태자(太子)로써 동궁(東宮)에 거처할 때 장비(張妃)라는 태자비(太子妃)가 경기(經期)가 없은지 열 달째 였으며 복통이 매우 심했다. 대부분의 어의들은 태자비가 임신했다고 모두들 기뻐 하고 있었다.

 

성인은 장비의 맥을 짚고 난 후 태자비가 임신한 몸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어의들은 성인의 말을 듣고 깜짝놀랬다. 성인은 어의들에게 "차혈질야(此血疾也), 당용이약(當用利藥)"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장비의 병은 혈병입니다. 약을 쓰면 치료됩니다" 는 뜻이다.

 

장비는 성인의 진단이 지당하다고 믿고 성인의 처방을 따라 복약하였다. 그 다음 날 장비의 병은 치유되었다. 장비는 6 대 임금 영종(英宗) 정통(正統) 6 년(서기1441년)에 죽었다. 성조는 성인에게 동전 일 천 관(貫)을 하사하였다.

 

성조가 죽고나서 인종(仁宗:서기1425)이 즉위하였다. 인종이 즉위한지 일년도 채 못되어 선종(宣宗:서기1426-1435) 즉위하였고 선종은 성인을 북경 태의원에 임명하였다. 성인은 남경 태의원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짓고 북경 태의원을 향하여 올라가는 도중 갑자기 병이 생겼다. 성인은 스스로 자신의 맥을 짚어보고  "오불기의(吾不起矣)"  라는 단 세마디 말을 남기고 향년 67 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제 살아날 수 없다."  는 뜻이다.

 

성인의 동생 굉(宏)과 아들 준( )과 조카 륜(倫)과 손자 광(曠)등이 모두 성인으로 부터 의술을 이어 받았다.


출처 : 구암등산카페
글쓴이 : 구암(具東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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